완 벽

한 치의 오차나,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완벽을 위하여, 매 순간 고심합니다.

실상,

거대한 선박이 바늘 구멍만한 구멍을 방치하다 바다 한 가운데서 침몰의 위험에 처할 수도 있고,

요즘처럼 변화무쌍한 세상에 법 없이 살다가 불이익을 당하거나,

험난한 세상에 방심하다가 눈뜨고도 코 베일 수도 있으니,

우리 인생사에 이처럼 중요한 덕목도 없을 듯 합니다.

 

하느님도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실수를 용납하시지 않으셨고, 모세의 실수, 사울왕의 실수 또한, 용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가나안7족, 아말렉족의 죄악을 다 갚기까지, 용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철두철미, 율법을 지켜내려는 완벽주의가 탄생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들은 안식일에,

38년 동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환자를 일으키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의 선행조차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먹고,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정결례를 지키지 않고, 금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완전하시지만, 완벽을 요구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꺼져 가는 등불, 상한 갈대를 귀찮아, 끄거나 꺾지 않고, 다시 일어나 소성, 번창하기를 끝까지 기다리며, 격려하십니다.

울안에 들어있는 99마리의 양보다, 잃은 1마리의 양을 불쌍히 여겨, 벼랑과 가시밭길을 헤매며, 애타게 찾으십니다.

하느님은 또한, 건강한 자보다, 병든 자를 위한 의원이 되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버린 돌을 선택하시고, 그 돌로 건물의 머릿돌로 삼으십니다.

하느님은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재판장이 되어 주십니다.

자기 몫을 챙겨 타국에 가서 탕진한 아들이 살아 돌아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아버지입니다.

죄인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속죄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죄악은 미워하시나, 인간을 사랑하시어, 돌이켜 하느님의 품속에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완벽을 추구하던 알렉산더, 나폴레옹, 히틀러는 수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습니다.

각자, 제 태어난 고향에서, 제 언어 사용하며, 무모한 뜻 품지 않고, 제 분복대로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에 감사하며, 평화로이 사는 삶을 낙으로 삼는 것이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뜻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들은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처럼, 온 세상을 정복하여, 자신의 수하에 두려 하는, 완벽을 추구하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그들은 완벽을 추구하다가, 자신들의 수()도 채우지 못한 채,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꿈꾸는 완벽은 무모하기 짝이 없어, 창조주를 얕보다가 멸망을 자초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꺼져가는 등불마저 끄지 않고, 상한 갈대라도 꺾어 버리지 않고, 애긍하며 그들의 행복을 돕는 마음이 하느님의 완전에 다가서는 길이 됩니다.

 

사람은 하느님처럼 완전해지기를 소망합니다.

용서와 사랑이야말로, 사람이 완전해지는 길입니다.

그것은 실수도, 허물도 과감히 허용하고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용서와 사랑이 없는 완벽은 완전의 길에 장애일 뿐입니다.

또한 완벽을 추구하는 자신 역시, 실수와 허물많은 인생입니다.

내 허물에 눈감고, 남의 허물에 가혹한 것은, 또 하나의 허물을 더하는 것이 됩니다.

용서와 사랑이야 말로, 인간을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만드는 덕목입니다.

 

완벽은,
전혀 허물과 실수를 찾을 수 없는 냉혈한이 되는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허물과 실수를 저지르며,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어,
용서와 사랑이 필요하여,
하느님께서 특별히 돌보시는,
인간미가 있는 겸손한 사람속에 은밀히 내재된,
사람의 영역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영역의 신비한
 것이 아닐까요?

2012년 5월 17일 오후 4시 11분

 

 

 

 

by vita | 2012/05/17 16:45 | 트랙백 | 덧글(0)

거룩해지다

행여 더러워질세라,

씻기시고,

깨끗한 새옷 내어 입히시고,

 

행여 병이 들세라,

깨끗한 음식 마련하여 먹이시고,

 

명길고, 복많아라!

아직 알아듣지도 못할 아기 눈맞추며,

기도문처럼 외워주셨다.

 

스스로 무얼 좀 알 나이에,

물 닿는 것이 귀찮아,

안 씻겠다 떼 쓰다 종아리 맞아 흉터가 남을 만큼,

청결에 열심이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의 지치지 않는 노심초사에,

64세 되도록 큰 병없이 건강하게 잘 지낸 것이리라.

 

나의 하느님!

나의 어머니처럼,

항상 나를 불러,

귀찮아 죽을 만큼,  거룩(깨끗, 성결)해지라 하신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죄씻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의의 옷입고,

하느님 말씀, 양식 삼고,

성령 모시어,

하느님처럼 거룩해지라 하신다.

 

내 어머니가 내게 소원이듯이,

내 하느님도 내게 소원인 것은,

깨끗하고 거룩하여,

병약하거나, 아프지 말고 건강하여,

오래 오래,

아니 영원 무궁히,

하느님 나라에서 함께 낙을 누리며 살자 하신다.

 

나의 어머니,

나의 하느님께서,

내게 소원이신 그것은-

내가 영원히 살기를..

내가 복받고 살기를..

 

그래서,

깨끗하라!

거룩하라!

성결하라!

 

행여 잊을세라,

잊기도 잘 잊는 내게,

항상 외워주시는 것이다.

 

깨끗한 것이 바로-

영생과 복락의 길임을,

행여 잊을세라,

늦추는 일없이, 일깨워주시는 것이다.

2012년 5월 13일 오전 9시 53분

by vita | 2012/05/13 10:20 | 트랙백 | 덧글(0)

하느님의 공정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어느 누구에게나 그 자비를 공정히 베푸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공정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는 물론,

심지어는 악한 사람에게도, 비와 햇볕을 주십니다.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 모두가,

같은 환경의 지배를 받아, 환경이 끼치는 축복과 재해를 함께 나누어 받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하여 보면,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그 누구에게나 똑같이 라는 그 말 자체가 공정같아 보이나, 불공정한 것이 됩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거리로 나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을 약속하고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품꾼으로 포도원에 들였습니다.

낮과 저녁무렵까지 여러 차례,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어 거리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한 데나리온씩의 품삯을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였습니다.

날이 저물어지자,

나중에 와서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아침 일찍 온 사람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의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에, 처음 온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와서 종일 더위를 견디며 수고한 우리와, 나중에 와서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똑같이 주느냐? 며,

처음 온 사람들이 주인을 원망하자, 주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지 아니 하였느냐?

나중 온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사람의 헤아림과, 하느님의 헤아리심은 똑같지 않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게 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공정입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측량하는 잣대와 저울의 공정은 다릅니다.

사람이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을 헤아린다면,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은 영원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마저 헤아리십니다.

 

이것이 사람이 불공정하다 여기는,

하느님의 공정 입니다.

하느님의 공정은,

뒤 처지고, 소외된 자마저 돌아보고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99마리의 양보다, 잃은 1마리의 양을 걱정하며, 찾으시는 것이 하느님의 공정입니다.

 

하느님은 포도원 주인처럼,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며,

당신 뜻대로 행하실 권한을 가지신 주권자이시며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며,

언제든, 무슨 일이든, 가능, 전능하신 분이시며,

모든 사람의 마음과 사정을 감찰하시는, 전지하신 분이시기에

그 누구도 거저 주신 것을 가지고, 불평하거나, 자랑할 수 없습니다.

 

악은 불의 불법의 힘으로 세상의 많은 혜택을 누리고,

고아나 과부, 약자들은, 불법, 불의에 의한 불공정을 당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재판장, 약자의 능력이 되시어 특별한 가호로 보살피십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하느님은 건물의 모퉁이 돌로 쓰십니다.

세상이 버린 예수님을 높이 올리시어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며, 강한 자와 높은 자를 낮추십니다.

이것이 자비, 전지 전능의 주권자, 하느님의 공정입니다.

 

또한,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명을 받은 모세도 하느님의 사자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오로도 평생 그의 몸에 가시가 따라 다녔습니다.

그 가시를 제거하여 주실 것을 3 번이나 기도를 드렸을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냉담한(?) 응답뿐이었습니다.

사람의 약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능력이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스스로를 비울 때, 비로소 하느님의 풍요가 채워집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비록 모세와 같은 사명자라 할지라도,

하느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바벨탑도 허사가 되고,

40년을 공들여 세운 예루살렘 성전도 돌 하나조차 돌 위에 놓이지 않을 만큼,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문명은,

하느님께 가소로워, 비웃음을 당할 뿐입니다.

 

불에도 타지 않고, 폭풍에도 무너지지 않고 영원히 남을 것은

하느님의 말씀위에 굳게 세우는 것들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세우는 믿음입니다.

겸손과 순종입니다.

 

하느님은 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십니다.

인간이 한 점 티끌도 되지 않는 세상에 몰두한다면,

하느님은 영원, 무한을 창조하십니다.

사람이 영원할 것처럼 믿고 사랑하는 것들은,

하느님의 영원의 시간 속에 한 점, 티끌일 뿐입니다.

 

세상의 넓은 길은 지옥으로-

좁고 협착한 길은 천국으로-

이것이 하느님의 공정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많은 수확을 거두며,

좁은 길을 찾으면,

영원 무궁의 낙원으로 들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공정입니다.

 

선을 행한 자는 생명과 복락의 낙원으로-

악을 행한 자는 사망과 저주의 지옥으로-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공정입니다.

2012년 4월 28일 오전 8시 53분

by vita | 2012/04/28 14:41 | 트랙백 | 덧글(0)

내 마음의 현주소

네가 어디 있느냐?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의 소재지를 묻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이 사랑의 언어를 처음 쓰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선악과의 효과는-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발가 벗고 있었음을 인식하게 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벗은 몸이 수치스러워졌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수치를 가려보려 하였습니다.)

동산을 거니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져,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 때,

하느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창조하신 아버지,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을 만큼, 깊은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그들 사이에 수치와 두려움이라는 장벽이 둘러쳐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물으신,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물음은-

“네가 한 일이 무엇이냐?”

“네 마음의 현주소가 어디냐?”

“지금 네가 어느 방향(생명? or 사망?)으로 가고 있느냐?” 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마음의 현주소는,

에덴이라는 지상 최대의 낙원에서 사망과 저주의 자리로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생명나무가 아닌,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그것을 결정토록 한 것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 유혹한 뱀도,

돕는 배필로 주시어,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한 그의 아내 하와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아담 자신의 마음이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지금도 항상,

내 마음의 현주소를 하느님은 물으십니다.

 

- 부귀, 영화, 공명, 권세 -

내 마음이 열망하고, 향하는 방향들입니다.

언젠가 세상과 함께 불타 없어질,

저주와 사망을 안겨줄 선악과로 향하는,

내 마음의 현주소 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쉬지 않고,

네가 어디 있느냐? 부르십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옵소서! 응답한 사무엘처럼,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소서! 응답한 이사야처럼,

 

우리 마음의 현주소를 겸손과 순종의 자리에 두고,

하느님의 도구가 될 때,

영생복락을 주는 생명나무가 있는 낙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2012년 4월 21일 오후 2시 49분

 

 

by vita | 2012/04/21 15:17 | 트랙백 | 덧글(0)

길은 여러 방향과 갈래가 있습니다.

그 방향과 갈래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합니다.

옳은 방향과 지름길을 제대로 찾을 때,

빠른 성공을,

방향을 잘 못 잡거나, 갈래를 잘 못 들어설 때,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며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올바른 방향과 지름길을 찾기 위하여,

좋은 스승을 찾고, 양서를 읽으며, 지혜를 구합니다.

솔로몬은 부와 권세, 영광을 구하기 앞서, 그들을 성취시켜줄 지혜를 구하였고,

그 지혜의 근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법을 지키는 사람은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법이 바로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법은 그 법을 준수하는 사람을 보호하나, 그 법을 위반하는 사람을 보호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길을 따라 살면 생명과 복에 도달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님을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시는 길이 되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음에 이른 모든 사람을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순종과 겸손, 사랑의 십자가가 만들어 놓은 길입니다.

2012년 4월 18일 오후 6시 53분

 

by vita | 2012/04/18 19:10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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